전체 글164 마녀배달부 키키 (슬럼프, 자립, 성장 서사) 솔직히 처음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큰 사건도 없고, 악당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는데 영화가 끝날 때쯤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습니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열세 살 소녀가 홀로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안에 성장의 가장 솔직한 단면이 담겨 있습니다.슬럼프를 이렇게 정확하게 그린 애니메이션이 있었나제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어렵게 느꼈던 장면 유형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이 '멈추는 순간'을 화면에 담는 일입니다. 성장을 직선으로 그리면 깔끔하고 보기 좋지만, 실제로 사람이 성장하는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영화입니다.키키는 어느 순간 빗자루가 떠오르지 않게 되고, 고양이 지지와의 대화도 끊깁니다. 이것을 영화 용어로 '.. 2026. 4. 19.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세계관, 성장서사, 도고온천) 어린 시절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왜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가 됐는지 단 한 줄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빠져들었습니다. 설명이 없는데 세계가 완성돼 있었습니다. 2001년 개봉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 역대 흥행 수입 1위를 지키고 있는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야기입니다. 제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냥 넘겼을 디테일들이, 이 작품 앞에서는 전부 공부가 되었습니다.설명하지 않아도 완성되는 세계관제가 짧은 단편 영화를 찍을 때 가장 고민했던 건 세계관 설명이었습니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대사로 설명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보여줘야 할지를 두고 편집 단계에서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센과 치히로를 다시 보면서 직접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설명하지 않는.. 2026. 4. 19. 노매드랜드 (사회구조, 논픽션, 클로이자오)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석권한 영화가 있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단순한 로드무비라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사회구조의 붕괴가 만들어낸 현대 유목민2008년 금융위기(Financial Crisis)는 단순히 주가가 폭락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금융위기란 신용 시스템이 연쇄 붕괴하면서 수백만 명의 생계 기반이 한꺼번에 무너진 구조적 재앙을 의미합니다. 그 여파는 10년도 더 지나 네바다주의 작은 마을 엠파이어까지 닿았습니다.2011년 1월, 미국 최대 석고보드 제조사인 US 석고(USG)가 88년 역사의 엠파이어 공장을 폐쇄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마을의 우편번호마저.. 2026. 4. 19. 오만과 편견 (절제된 감정, 시선 연기, 관계 변화) 솔직히 처음 이 영화를 틀었을 때, 19세기 영국 귀족 사회 이야기라는 배경만 보고 좀 지루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 멈추질 못했습니다. 대사보다 시선이 더 많은 걸 말하고 있었고, 그 침묵의 긴장감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은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감정을 어떻게 숨기고 또 어떻게 꺼내는가에 대한 영화였습니다.절제된 감정이 만드는 긴장: 시선 연기의 힘제가 영상을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데, 그때 가장 어려웠던 게 바로 감정 표현의 밀도를 조절하는 일이었습니다.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오히려 감동이 얕아지고, 너무 숨기면 전달이 안 됩니다. 오만과 편견을 보면서 그 균형을 정말 잘 잡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 영화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감정선.. 2026. 4. 18. 침묵의 친구 (연출방식, 다시점구조, 프로젝트헤일메리) 영화 크레딧에 나무와 식물들의 이름이 한 줄씩 올라가는 장면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양조위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영화였는데, 결과적으로 예상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다시점 구조와 세 개의 시간침묵의 친구는 단일 서사가 아닙니다. 1908년, 1972년, 2020년이라는 세 개의 시간축이 교차 편집(cross-cutting)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교차 편집이란 서로 다른 시간이나 공간의 장면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하나의 주제 아래 연결하는 편집 기법으로, 관객이 스스로 각 이야기의 연결점을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 기법을 몇 차례 써본 경험이 있습니다. 솔직.. 2026. 4. 18. 트루먼 쇼 리뷰 (시선 구조, 메타픽션, 자유의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단순한 아이디어 영화로 봤습니다. '주인공만 모르는 리얼리티 쇼'라는 설정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설정 자체가 영화의 전부일 거라고 짐작했죠.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트루먼 쇼는 설정보다 훨씬 깊은 곳을 건드리는 영화였습니다.시선 구조가 만들어내는 이중 관객영화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트루먼을 보고 있는데, 동시에 트루먼을 보고 있는 또 다른 관객들이 화면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조에 들어가 맥주를 홀짝이며 트루먼의 일상을 시청하는 사람들, 세트장 달 안에 앉아서 모니터를 응시하는 총괄 책임자 크리스토프. 저는 어느 순간 내가 지금 저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등이 서늘했습.. 2026. 4. 18.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2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