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6 끝장수사 리뷰 (버디무비, 코미디, 수사물) 극장에서 영화를 고를 때 "이거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하나?"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저도 끝장수사를 보기 전에 그 고민을 잠깐 했었는데, 보고 나서는 결론적으로 아깝다는 감정이 더 컸습니다. 아까운 이유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잘 될 수 있었던 영화가 여러 이유로 제 가능성을 다 못 펼쳤기 때문입니다.버디무비 공식에 갇힌 코미디, 왜 삐걱거렸나끝장수사는 버디무비(buddy movie) 장르를 기반으로 합니다. 버디무비란 성격이 정반대인 두 주인공이 처음에는 충돌하다가 점차 호흡을 맞춰가는 서사 구조를 말하는데, 경찰 파트너물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포맷입니다. 배성우가 연기한 제역과 정가람이 연기한 중어의 설정도 그 전형을 그대로 따릅니다. 잘 나가다 강등된 베테랑 형사와, 재벌 2세 인플루언서 출신 신입.. 2026. 4. 10.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 (영화 각색, 발달성 난독증, 원작 소설) 원작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을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나왔을 때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로 각색이 깊었습니다. 음악과 기억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다루는 작품인 건 분명한데, 소설이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영화에서 통째로 사라져 있었습니다.원작 소설과 영화의 출발점이 왜 이렇게 다른가이 작품의 원작 소설은 서술 트릭(narrative trick)을 핵심 무기로 사용합니다. 서술 트릭이란 화자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자체를 이용해 독자를 의도적으로 오해하게 유도하는 기법입니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 즉 남자 주인공 미즈시마 하루토가 누군가에게 여자 주인공 토사카 아야네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 2026. 4. 10. 살목지 리뷰 (공간 연출, 점프 스케어, 빌드업)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시사회 반응을 보고 꽤 기대를 품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드는 감정이 딱 하나였습니다.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됐는데." 살목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 실존하는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한국 공포 영화로, 2026년 4월 8일 개봉했습니다. 공간이 만들어내는 불안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공간 연출이 만들어내는 공포의 질감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집중한 건 이야기의 전개보다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저수지, 안개, 울창한 숲길, 흐린 수면. 이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쌓이면서 살목지라는 장소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처럼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건 분명히 의도된 미장센(mise-en-scène) 전략입니다. .. 2026. 4. 10. 휴민트 리뷰 (첩보 액션, 멜로, 류승환) 첩보 액션 영화라고 하면 보통 냉철한 수싸움과 스피디한 추격전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휴민트는 그 기대를 정면으로 비틀어버립니다. 저도 처음엔 베를린 같은 묵직한 첩보전을 예상했는데, 스크린 앞에 앉고 나서 이건 다른 영화라는 걸 꽤 빠르게 눈치챘습니다.정보와 신뢰로 긴장감을 만드는 방식휴민트(HUMINT)란 Human Intelligence의 약자입니다. 쉽게 말해 기계나 기술이 아닌 사람을 통해 직접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영화 제목 자체가 이미 이 작품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총이나 폭탄보다 사람 사이의 신뢰와 배신이 더 강력한 무기가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왔습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2026. 4. 9. 해운대 리뷰 (개봉 배경, 구조 분석, 흥행 공식) 재난 영화를 볼 때 가장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항상 이 질문을 던집니다. 2009년 개봉한 해운대는 국내 최초 대형 쓰나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타이틀을 달고 1,132만 관객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직접 보고 나서 들었던 첫 번째 감정은 기대와 혼란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습니다. 재난 영화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사람 이야기만 하는 걸까.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꽤 흥미로웠습니다.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탄생 배경2009년 여름 극장가는 꽤 특별한 상황이었습니다. 헐리우드 재난 영화들이 매년 여름 스크린을 장악하던 시절, 한국 관객들은 자막과 낯선 배경 속에서 폭발과 홍수를 감상해야 했습니다. 해운대는 바로 그 빈틈을 파고들었습니다.블록버스.. 2026. 4. 9. 픽사 업 리뷰 (감정 연출, 서사 구조, 캐릭터 관계) 솔직히 저는 애니메이션을 그냥 아이들 보는 장르로 치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픽사의 업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건 내가 연출 공부를 하면서 놓쳤던 것들이 다 담겨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특히 초반 10분은 저한테 꽤 큰 충격이었습니다.감정 연출 — 대사 없이 감정을 전달하는 법제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자주 의존했던 건 대사였습니다. 캐릭터가 어떤 감정인지 직접 말하게 하거나,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업의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나서 그게 얼마나 초보적인 발상인지 실감했습니다.칼과 엘리의 삶 전체를 약 4분 안에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거의 대사 없이 진행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주얼 스토리텔링(Visual Storyt.. 2026. 4. 9.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