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중간에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처음 봤을 때 딱 그랬습니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데,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겉보기엔 판타지 로맨스 같지만, 볼수록 이 영화는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닭다리 달린 성과 반전 메시지, 그 배경을 알면 더 보인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가장 먼저 화제가 됐던 건 다름 아닌 성의 디자인이었습니다. 굴뚝에서 연기를 뿜으며 닭다리로 걸어다니는 그 기묘한 성, 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인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원작 소설에는 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다리가 있는 형태로 직접 상상해서 디자인했고, 일본 전통 무사의 다리 형태와 닭다리 형태 두 가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합니다. 결국 역동성과 불안정한 느낌을 동시에 주는 닭다리를 선택했고, 이 디자인은 프랑스 건축계에서 "현대의 피카소 같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 선택이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요소, 즉 배경, 소품, 인물의 위치까지 포함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이 성의 생김새 자체가 이미 미장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삐그덕거리고, 누추하고, 어딘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성은 사실 하울의 마음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대놓고 반전(反戰) 메시지가 깔려 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어린 시절 미군의 폭격 속에서 자란 경험이 있고, 그 트라우마가 평생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영예로운 상을 받았을 때, 당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진행 중이었다는 이유로 미야자키 감독은 직접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애니메이션 한 편에 이런 맥락이 담겨 있다는 게, 보고 나서도 한참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소피와 하울, 변화하는 캐릭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저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습니다. 소피는 왜 저주에 걸린 후에 오히려 더 씩씩해지는 걸까요?
저주에 걸려 갑자기 할머니가 된 소피는 처음엔 당연히 당혹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이후부터 소피는 더 직접적으로 말하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이건 단순한 코미디적 설정이 아닙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내면적으로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곡선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소피의 아크는 외형의 변화와 정반대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외모는 늙어가지만, 내면은 점점 젊어지고 주체적으로 변해갑니다.
제가 직접 단편 작업을 할 때 캐릭터를 하나의 고정된 성격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짰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나서, 변화 자체가 캐릭터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습니다. 소피의 저주가 일종의 해방이었다는 해석도 그래서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울은 또 어떻습니까. 이전 미야자키 작품의 남자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하울은 꽤 이질적인 인물입니다. 잘생기고 마법도 강하지만, 겁이 많고 전쟁을 두려워해서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히키코모리란 사회와의 접촉을 끊고 자신만의 공간에 칩거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일본어 표현입니다. 하울의 캐릭터 설계에는 이 히키코모리적 심리가 분명하게 녹아 있고, 그게 오히려 이 인물을 더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이 영화에서 소피가 하울의 성을 청소하는 장면이 단순한 가사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거대한 성이 하울의 마음을 상징한다면, 소피는 그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어지러운 내면을 정리해주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 영화가 여성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제작 당시 일본 내부에서도 "주인공이 할머니 모습으로 대부분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팔리겠냐"는 반대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강하게 주장을 밀어붙였습니다. 여성의 매력은 나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역할과 분위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점은 오늘날 영화 제작 원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젠더 재현(gender representation)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젠더 재현이란 미디어 속에서 성별이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고 역할이 부여되는지를 분석하는 개념입니다(출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이 영화에서 영화 만드는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
영화감독의 시선으로 보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서사 완결성보다 이미지와 감정을 선택한 작품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면서 "이 장면이 왜 여기 있지?"라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가 헐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 헐거움이 오히려 관객이 스스로 해석할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점입니다. 내러티브 갭(narrative gap)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내러티브 갭이란 이야기 안에 의도적으로 남겨진 공백으로, 관객이나 독자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채워 넣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공백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배울 수 있는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상징적 공간 설계: 성 자체를 캐릭터의 내면을 반영하는 공간으로 활용
- 캐릭터 이중성: 외형의 변화와 내면의 성장을 반대 방향으로 설계해 긴장감 형성
- 서사의 공백 활용: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의 해석에 맡기는 연출 방식
그리고 이 영화를 논하면서 OST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곡가 히사이시 조가 만든 '인생의 회전목마'는 하나의 주제 선율을 기반으로 장면마다 다르게 편곡되어 등장합니다. 주제 선율(leitmotif), 즉 라이트모티프란 특정 인물이나 감정, 상황을 대표하는 음악적 동기로,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감정의 흐름을 강화하는 기법입니다. 이 기법 덕분에 음악만 들어도 그 장면의 감정이 떠오를 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깁니다.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완성된 이 음악은 극장에서의 음향 체험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며, 그 결과 화면 밖에서도 영화의 세계를 소환하는 힘을 가지게 됐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등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출처: 일본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처음 보는 것과 두 번째 보는 것이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작품이 오래 살아남습니다. 한 번 봤을 때는 이미지에 압도되고, 두 번째에는 상징이 보이고, 세 번째에는 비로소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직 한 번밖에 보지 않으셨다면, 다시 한 번 틀어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닭다리 달린 성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소피가 왜 청소를 하는지, 이번엔 다르게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