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이 나온 지 정확히 20년 만입니다. 저는 이 숫자 하나로 이미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20년이면 캐릭터도, 배우도, 세상도 달라질 시간이니까요. 감독 데이빗 프랭클과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에밀리 블런트, 스탠리 투치까지 주요 4인방이 모두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나마 안도감을 줬습니다. 과연 그 20년의 무게를 영화가 제대로 담아냈을까요?
20년 후의 캐릭터들, 달라진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캐릭터들의 '포지션 변화'였습니다. 1편에서 앤디는 패션 매거진 런웨이에서 미란다의 퍼스트 어시스턴트(First Assistant), 즉 편집장의 수석 비서로 일했습니다. 여기서 퍼스트 어시스턴트란 단순 비서 이상의 역할로, 편집장의 스케줄부터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24시간 대응해야 하는 패션 매거진 업계의 핵심 직책을 뜻합니다. 그런데 2편에서 앤디는 에디터(Editor)로 돌아옵니다. 에디터란 단순 실무자가 아니라 콘텐츠의 방향과 논조를 결정하는 편집 전문직으로, 저널리즘 분야에서는 글의 최종 책임자에 가깝습니다. 같은 공간, 다른 위치. 저는 이 설정 변화가 단순한 직급 상승이 아니라, 앤디라는 인물의 성장 서사를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느꼈습니다.
미란다의 변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편에서 그녀는 비서 책상에 코트를 집어던지는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 그 자체였는데, 2편에서는 코트를 직접 걸고 편집 회의에서 독설이 나오면 비서가 옆에서 바로 제지합니다. 이 비서 역할을 브리저튼 시즌 2 여주인공이었던 시몬 애슐리가 맡았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브리저튼에서 보여준 강렬한 존재감을 생각하면 비중 있는 역할을 기대했는데, 정작 영화에서는 미란다 옆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돼요'를 반복하는 수준으로 그치더라고요. 라이징 스타를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싶었습니다.
새로운 캐릭터 중에서는 루시 리우가 연기한 사샤가 내용상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던 거물 여성이 앤디와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마지막에 런웨이의 모기업 전체를 인수하는 구조입니다. 레이디 가가는 본인 역으로 특별 출연하는데, 저는 그 공연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케네스 브래너가 미란다의 새 남편으로 등장해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치로 쓰이는 건 나쁘지 않았고요.
2편이 다루는 핵심 주제 중 하나가 세계 경제 전반의 대격변입니다. AI 언급도 잠깐 나오고, 패션 업계뿐 아니라 모든 산업이 재편되는 시대라는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글로벌 패션 산업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속도는 가파릅니다. 디지털 전환이란 기업이 디지털 기술을 전면 도입해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바꾸는 과정을 뜻하는데, 패션 업계에서는 온라인 판매 전환, AI 디자인 도입, 인플루언서 마케팅으로의 이동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23년 기준 글로벌 패션 이커머스 시장 규모는 약 7,0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2030년까지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이 예상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McKinsey & Company).
2편에서 런웨이가 겪는 위기 역시 이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협력 브랜드의 노동자 처우 논란에 휘말려 공범 이미지가 붙고, 모기업 회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새 회장이 예산을 대폭 삭감합니다. 미란다가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타는 장면은 그냥 웃음 포인트가 아니라, 이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저는 특히 캐릭터별 포지션 변화가 인상 깊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앤디: 퍼스트 어시스턴트 → 해고 후 재취업, 에디터로 복귀
- 미란다: 절대권력 편집장 → 예산 삭감과 노동 논란으로 흔들리는 편집장
- 에밀리: 런웨이 퍼스트 어시스턴트 → 디올 이직 후 런웨이 복귀를 노리는 야심가
- 나이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여전히 미란다 곁에서 핵심 역할
에밀리의 역습과 나이젤의 진심, 이 영화의 진짜 킥은 어디에 있는가
2편을 보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가 에밀리의 서사였습니다. 1편에서 에밀리와 앤디의 관계는 이 시리즈 최고의 케미스트리(Chemistry)였다고 생각합니다. 케미스트리란 두 캐릭터 사이의 묘한 호흡과 흡인력을 뜻하는 영화 용어로, 흔히 '케미'라고 줄여 부릅니다. 서로 정반대 성향이면서도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그 관계가 1편을 재미있게 만든 핵심이었거든요. 메릴 스트립의 미란다가 이 시리즈의 상징적 얼굴이라면, 에밀리와 앤디의 케미가 그 안을 채우는 실제 온기였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2편에서 에밀리는 디올로 이직한 상태입니다. 사실 이 이직도 미란다가 반쯤 좌천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에밀리는 속으로 런웨이 편집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인수자를 이용해 미란다를 몰아내겠다는 계획이 중반부에 드러나는데,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에밀리의 역습' 시퀀스가 생각보다 너무 짧게 처리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완전한 빌런으로 가기엔 에밀리와 앤디의 관계를 포기해야 하고, 그렇다고 흐지부지 마무리하자니 서사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딜레마. 결국 에밀리는 잠깐 발을 담갔다가 뒤에 화해하고 친구가 되는 방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도저도 아닌 느낌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나이젤의 서사는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앤디가 런웨이에 다시 합류하게 된 배경에 나이젤의 제안이 있었다는 반전, 그리고 1편에서 미란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했던 나이젤이 2편에서 드디어 중요한 자리를 받는 장면. 제 경험상 이런 조연 캐릭터의 감정선이 제대로 정리될 때 영화의 인상이 크게 달라지는데, 나이젤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이젤이 진짜로 원했던 건 자기 브랜드였잖아요. 그 꿈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 없이 분위기만 만들어 놓고 끝내는 건 여전히 아쉽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또 하나의 개념이 내러티브 클로저(Narrative Closure)입니다. 내러티브 클로저란 이야기 속 갈등과 관계가 최종적으로 봉합되는 과정을 의미하며, 속편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1편에서 열린 채 남겨진 관계들, 특히 미란다와 앤디 사이의 감정 고리가 2편에서 어떻게 정리되는지가 관객의 만족도를 결정짓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속편 영화의 흥행 성공률은 1편 대비 관객의 캐릭터 몰입도와 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1편의 오프닝을 상징했던 KT 턴스톨의 Suddenly I See가 2편에서 빠진 것도 저는 아쉬웠습니다. 대신 마돈나의 Vogue와 시어도어 샤피로의 오리지널 테마가 재활용되는데, 이 시리즈의 시그니처 곡을 바꾸는 선택이 영화의 전체 톤 변화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통통 튀던 에너지에서 좀 더 무게감 있는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전환한 느낌이라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 '통통 튀는 에너지'를 대체할 새로운 매력이 이번 작품에서 충분히 채워졌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성공 이후에도 선택은 계속되는가. 앤디도, 에밀리도, 미란다도 여전히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를 포기합니다. 저는 이 구조가 단순한 직장 드라마를 넘어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려 했다고 생각하는데, 연출의 에너지가 각본의 의도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한 느낌이 남습니다. 1편을 좋아했다면 후반부 캐릭터 봉합의 감정선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1편을 보지 않고 입장하는 건 권하기 어렵습니다. 이 영화의 감동은 결국 20년치 기억이 쌓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