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왜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가 됐는지 단 한 줄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빠져들었습니다. 설명이 없는데 세계가 완성돼 있었습니다. 2001년 개봉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 역대 흥행 수입 1위를 지키고 있는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야기입니다. 제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냥 넘겼을 디테일들이, 이 작품 앞에서는 전부 공부가 되었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완성되는 세계관
제가 짧은 단편 영화를 찍을 때 가장 고민했던 건 세계관 설명이었습니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대사로 설명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보여줘야 할지를 두고 편집 단계에서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센과 치히로를 다시 보면서 직접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설명하지 않는 쪽이 훨씬 강력하다는 걸.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에서 비선형 세계 구축(Non-linear World Building) 방식을 택했습니다. 비선형 세계 구축이란 관객에게 세계의 규칙과 배경을 순서대로 설명하지 않고, 캐릭터의 경험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세계를 이해하게 만드는 서사 기법입니다. 쉽게 말해 '지도 없이 여행하는 것'처럼, 치히로가 처음 보는 것을 관객도 함께 처음 보는 구조입니다.
온천장의 이름 '유바바'가 운영하는 공간의 이름 '아브라야(유욕, 기름집)'도 그 자체로 세계를 설명합니다. 기름집이라는 단어는 에도 시대 일본에서 대중목욕탕을 지칭하던 표현에서 온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실제로 이 온천장의 모델로 공식 인정된 곳은 애히메현 마쓰야마에 위치한 도고온천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중 하나로, 3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며 헤이안 시대 문학 작품 겐지 모노가타리에도 등장하는 곳입니다.
저도 일본 시코쿠 여행 중 직접 다카마쓰에서 차를 몰고 도고온천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고급 료칸을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오래된 건물의 공중목욕탕이었거든요. 나무 계단을 밟으며 올라가는 순간, 그때 느낀 건 이 공간이 영화 속 유혹과 너무 닮아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단순히 '모델이 됐다'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비일상으로 진입하는 느낌을 주고 있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세계관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비선형 세계 구축: 규칙을 설명하지 않고 경험을 따라가며 세계를 이해하게 함
- 공간의 이중성: 온천장은 신들의 휴양지이자 현대 자본주의의 축소판으로 기능
- 이름의 상실: 유바바가 이름을 빼앗아 지배하는 구조로 정체성 문제를 시각화
- 가오나시의 존재: 자아 없이 타인과 합일을 원하는 현대 젊은이의 상징
치히로의 성장서사, 그런데 성장이 아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분들은 대부분 치히로를 '약한 아이가 강해지는 성장 스토리'로 읽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미야자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건 치히로가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부터 갖고 있던 잠재적인 힘이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밝혔습니다. 이 한 마디가 저한테는 꽤 오래 걸렸습니다.
영화 연출의 시선으로 보면 이 차이는 큽니다. 성장 서사(Coming-of-age Narrative)는 결핍에서 충족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가집니다. 여기서 성장 서사란 주인공이 처음에는 부족하거나 미숙한 상태로 시작해 여러 사건을 거치며 능력이나 인격을 획득하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그런데 치히로는 처음부터 부모를 구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오물신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사건들은 '훈련'이 아니라 '발견'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제가 직접 여러 번 다시 보면서 확인한 장면이 있습니다. 치히로가 유바바와 계약할 때 자기 이름의 한자를 살짝 틀리게 씁니다. 오기노 치히로라는 이름에서 치히로의 한자를 다른 글자로 쓴 건데, 이에 대해 감독은 명확한 해석을 피하면서 "그런 게 인생이에요"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명쾌한 답 대신 여지를 남기는 것, 그게 이 작품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가진 힘도 이 영화의 핵심 주제입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여기서 일하겠다"고 선언하는 치히로와, 말을 하지 못하는 가오나시를 대비시키면서 언어 행위(Speech Act)의 힘을 시각화했습니다. 언어 행위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떤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라는 개념으로, 철학자 존 오스틴이 제시한 언어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일하겠다"는 말 한 마디가 유바바의 지배 구조 안에서 하나의 권리를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이 개념을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이라는 성과는 단순히 작화 품질이나 스토리만으로 얻어진 게 아닙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정서적 밀도가 문화권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출처: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
히사이시 조의 음악과, 지브리가 감춘 뒷이야기
처음 치히로의 테마곡 '어느 여름날'을 들었을 때, 이 곡이 풀 오케스트라 편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단출하게 들렸습니다. 히사이시 조는 원래 피아노 한 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관을 담기 위해 조금씩 편곡해 나가다 보니 풀 오케스트라가 됐고, 공기감을 살리기 위해 스튜디오가 아닌 콘서트홀에서 라이브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오케스트라 편성(Orchestration)이란 각각의 악기들이 맡는 역할을 조율해서 하나의 음향 층위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이 곡에서 단음 피아노 멜로디와 현악기만 나오는 파트는 치히로의 차분하고 고요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됐습니다. 제가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그동안 그냥 '예쁜 음악'으로 듣던 곡이 완전히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히사이시 조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 방식도 독특합니다. 감독은 시나리오도 콘티도 없는 상태에서 히사이시를 작업실에 불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히사이시가 곡을 구상하는 방식인데, 이는 사실상 즉흥 작곡(Improvisation)에 가깝습니다. 즉흥 작곡이란 사전에 완성된 악보 없이 그 자리에서 음악적 아이디어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재즈나 일부 클래식 작곡가들이 활용하는 기법입니다. 1983년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후 40년 넘게 이어온 두 사람의 협업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브리의 제작 방식 자체도 업계에서는 예외적인 케이스로 꼽힙니다. 일반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은 1초에 3~8컷 정도를 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Limited Animation) 방식을 씁니다.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란 움직임이 많지 않은 장면에서 컷 수를 줄여 제작 비용을 낮추는 기법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 시절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의 표준 방식이 됐습니다. 그런데 지브리는 이 방식의 한계를 물량으로 돌파했습니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장면마다 작화 밀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독자적인 영상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출처: 일본 영화데이터베이스 JMDB).
지브리의 후계자 문제나 신작 소식도 늘 화제가 되지만, 결국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20년 전에 만든 이 작품이 있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다음 세대 감독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센과 치히로가 만들어낸 자리는 아직 누구도 채우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보고 나서 잊히고, 어떤 영화는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하게 만듭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후자입니다. 처음 봤을 때 몰랐던 것들이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설명 없이 보여주는 힘, 말이 현실을 만든다는 주제, 욕망과 정체성이 충돌하는 공간. 이 작품이 20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