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빌 머레이를 그냥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배우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인트 빈센트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까칠한 노인과 순수한 아이가 만난다는 설정만 듣고 뻔한 감동 영화겠거니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었습니다.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영화 속 주인공은 결함이 있어도 어딘가 매력적으로 포장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세인트 빈센트의 빈센트는 그런 공식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첫 등장부터 술에 절어 있고, 도박빚을 지고 있으며, 이웃과 한마디 나누기도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저도 처음 20분은 솔직히 이 사람이 왜 주인공인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영화에서 빈센트는 옆집으로 이사 온 올리버의 방과후 베이비시터를 맡게 됩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곳이 경마장이고, 집에는 스트리퍼를 불러들이며, 하는 말마다 거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묘사는 관객이 인물에게 반감을 갖게 만드는 장치로 쓰이는데, 이 영화는 그걸 오히려 관계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영화 비평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에 '안티히어로(Anti-hero)'가 있습니다. 안티히어로란 전통적인 영웅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 결함 자체가 서사의 핵심이 되는 인물 유형을 말합니다. 빈센트는 이 개념의 교과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단순히 안티히어로를 잘 그렸다는 것보다 그 인물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를 관객이 서서히 알게 된다는 점이 훨씬 강렬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예전에 직장 동료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말이 퉁명스럽고 무뚝뚝해서 '저 사람 되게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집안 사정이 많이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빈센트를 보며 그 기억이 겹쳐서 더 몰입이 됐습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빈센트라는 캐릭터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겉으로 드러나는 결함이 오히려 서사의 동력이 된다
- 억지로 변화하거나 교화되는 장면이 없다
- 숨겨진 따뜻함이 극적 장치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 관객이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장면 배치가 치밀하다
캐릭터의 힘과 휴먼 코미디의 계보
세인트 빈센트는 장르적으로 휴먼 코미디(Human Comedy)로 분류됩니다. 휴먼 코미디란 웃음을 유발하되 그 웃음이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관계에서 비롯되는 장르를 말합니다. 단순히 웃기기 위한 상황 설정이 아니라, 인물 간의 관계와 감정 변화가 유머의 원천이 됩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나 어바웃 어 보이 같은 작품들이 이 계보에 속하는데, 세인트 빈센트는 그중에서도 세대 차이를 핵심 축으로 삼은 점이 특징입니다.
일반적으로 세대 차이를 다룬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이 결국 서로를 닮아간다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그 공식이 여기선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빈센트는 올리버 때문에 부드러워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거칩니다. 그런데 올리버는 그 거친 사람 안에서 진짜를 발견합니다. 방향이 다릅니다.
빌 머레이가 이 역할을 위해 감독이 6개월간 설득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바 있는데, 그 말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건 그가 보여주는 연기가 전혀 '연기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정 하나, 대사 톤 하나가 다 살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몰입했던 장면은 빈센트가 병상에 누운 아내를 찾아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대사가 거의 없는데도 그 장면 하나로 이 인물의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영화 속에서 올리버가 수업 과제로 빈센트를 '성인(聖人)'으로 발표하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합니다. 성인(Saint)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묻는 장면입니다. 카테켁시스(Catharsis), 즉 감정의 정화와 해방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빈센트에 대한 관객의 누적된 판단이 그 발표 장면에서 단번에 해소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그리스 비극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관객이 극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고 심리적 안도를 경험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영화 심리와 관련한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반감을 가진 인물에게 공감을 느끼게 되는 서사 구조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단계적으로 개방하는 방식을 취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세인트 빈센트는 이 방식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러티브 구조 분석 측면에서 이 영화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서사를 통해 변화하거나 성장하는 곡선이 주인공이 아닌 조연(올리버)을 통해 전개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특정 인물의 내면이나 가치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나타내는 서사적 흐름을 의미합니다(출처: 영국영화연구소(BFI)).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끝나고 나서도 빈센트라는 사람이 머릿속에 남아서, 내가 살면서 저 사람을 어떻게 봤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빈센트를 처음 봤다면 피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불편하고 동시에 좋은 이유입니다.
세인트 빈센트는 분명 이야기 구조 자체는 예상 가능한 편입니다. 하지만 그 틀 안에서 빈센트라는 인물이 만들어 내는 밀도는 다른 영화와 다릅니다. 결국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 주변 사람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가치를 가집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첫인상에 속지 말고 끝까지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