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그냥 또 나온 일본 감성 멜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잔잔한 음악, 예쁜 두 배우, 교토 배경.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이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절반을 넘어가면서 제가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상대방이 이미 이별을 알고 있는 채로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초반의 평범한 장면들이 전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설정: 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비선형 서사란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뒤섞어 배치하는 이야기 방식을 말합니다. 일본 멜로 장르에서는 유독 이 방식을 즐겨 사용하는데,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너의 이름은》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영화도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합니다. 나츠키 다케루의 이 소설은 라이트 문학이라 불리는 장르에 속합니다. 라이트 문학이란 본격 순문학처럼 무겁지도 않고, 라이트노벨처럼 가볍지도 않은 중간 지점의 감성 소설을 일컫습니다. 쉽게 말해 읽기 부담 없이 감정에 집중하게 만드는 소설 형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뻔하다고 말하는 시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의 설정은 단순한 시간여행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시간을 살아갑니다. 타카토시에게 첫 만남이었던 날이 에미에게는 마지막 날이었고, 타카토시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에미에게는 이별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아이러니(irony)는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이러니란 표면에 드러난 것과 이면의 의미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극적 효과를 말합니다. 에미가 기묘한 타이밍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 타카토시가 손을 처음 잡았다고 기뻐하는 순간에 에미가 참지 못하고 울어버리는 장면들이 모두 이 구조 안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그 장면들을 처음 봤을 때 단순히 감수성이 예민한 캐릭터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전부 이별의 눈물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에미가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엇갈리는 게 아니야. 다리와 다리가 연결된 고리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어." 미래의 타카토시가 에미에게 했던 말을, 에미가 현재의 타카토시에게 전하고, 그 타카토시가 나중에 다시 에미에게 해줍니다. 이처럼 기원을 알 수 없는 역설 구조는 이야기에 묘한 깊이를 더합니다. 영화 장르 이론에서는 이를 자기 참조적 서사(self-referential narrative)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시간 설정을 두고 "익숙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설정의 신선함보다 설정을 감정에 활용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 구조를 설명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그 구조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낙차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감정 타이밍: 행복한 장면이 왜 가장 슬펐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통 멜로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이별 장면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이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장면들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타카토시가 에미의 스튜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순간, 함께 트리를 보면서 사귀자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들을 에미가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는지를 알고 나면 다시는 편하게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됩니다.
이 영화가 감정 전달에서 가장 잘 한 부분은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시점을 후반부로 미룬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렸던 감정이 한꺼번에 해소되면서 느끼는 정서적 정화 경험을 말합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쌓아두다가, 설정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관객이 스스로 초반 장면들을 다시 재구성하게 만듭니다. 그게 이 영화의 진짜 감동의 방식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는 두 번째 감정이 항상 더 큽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흘려보낸 장면들이, 설정을 알고 나면 전부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화관에서 끝까지 남아 음악을 들으면서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는 분들의 반응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 영화를 볼 때 주목해야 할 감정적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에미가 기묘한 타이밍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 전부 이별을 향한 카운트다운이었다
- 타카토시가 처음 손을 잡았다고 기뻐하는 순간: 에미에게는 기억 속 마지막 장면 중 하나였다
- 두 사람이 스튜를 함께 먹는 일상적인 장면: 에미가 미래의 타카토시에게 받은 정보를 실행한 것이었다
- 에미가 지하철 사이를 달리는 마지막 장면: 이별인데 달려간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전부를 담고 있다
이런 구조 덕분에 이 영화는 반복 관람 유인(re-watch incentive)이 높습니다. 반복 관람 유인이란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 봤을 때 전혀 다른 감상을 경험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를 말합니다. 실제로 원작 소설도 다 읽고 나면 처음 페이지로 돌아가고 싶어진다는 반응이 많습니다(출처: 나무위키 —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물론 이 영화가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반까지 이야기 흐름은 솔직히 느립니다. 설정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배우들의 비주얼 외에 영화를 붙잡아두는 힘이 약하다는 의견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일본 멜로 특유의 정적인 연출 방식이 맞지 않는 분들에게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가속하기 시작하는 후반부터는 그 느림이 오히려 감정의 무게로 전환됩니다.
영화 속 사랑이 유지되는 이유도 결국 설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에미가 이별인 줄 알면서도 매일 달려온 것, 그 마음이 없었다면 이 사랑은 시작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일본영화학회의 분석에서도 일본 멜로 장르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로 "운명보다 의지를 강조하는 감정 서사"를 꼽은 바 있습니다(출처: 일본영화학회).
뻔한 소재로 이 정도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단순히 소비하고 끝낼 수 없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일본 멜로 특유의 분위기가 맞는 분이라면, 혹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다만 중반부까지의 느린 호흡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그 느림을 버티고 나면, 그때부터는 영화가 대신 해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0점 만점에 7점짜리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감정이 오래 남는다는 기준에서는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위에 놓고 싶습니다.